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 === 예루살렘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십자군이 첫 출발을 하는 상황에서 명목상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했기에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1세기 초의 상황에는 동로마 제국도, 십자군도 서로에게 간섭을 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동로마는 단지 유명무실한 작위를 십자군 공국들에게 내려주거나,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참사]] 이후에도 제국에게 충성하고 있었던 몇몇 정교회 요새나 촌락들을 그들에게 양도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실제적으로 십자군이 동로마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동방 제국이 다시 강성해져 황혼기를 맞았던 12세기 중엽부터였다. 1130년대부터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라타키아, 에데사 등의 우르트메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이 때 다시금 지중해 강자 타이틀을 되찾은 제국의 군대를 막을 수 있었던 세력은 기껏해야 십자군의 숙적 [[장기 왕조]] 뿐이었으므로, 당시의 십자군 군왕인 [[풀크]]는 50여년 전에 선조들이 [[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조약을 인정하고 제국이 안티오키아 일대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1140년대부터 1180년까지 수십년간 제국의 황제들이 안티오키아의 군대와 주교 서임권을 마구 휘두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십자군이 굴복하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노르만계 귀족들이 동로마령 킬리키아와 키프로스를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다. 이들의 관계는 동로마가 동부 아나톨리아 해안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 13세기 이후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들의 관계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제국은 십자군에게 곡물, 무기 등의 필수품 뿐만 아니라, 비단, 유리, 세공품 등의 가공 사치품 등을 수출했고, 십자군은 제국에게 후추, 상황, 육구두와 몰약 등의 동방에서 가져와야 하는 고가의 향신료를 수출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향신료 무역에 있어서 유력한 시장이 아니었다. 폰투스와 트레비존드를 거쳐 동로마 제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향신료 양은 우리의 예상 밖으로 적었다. 12세기 ~ 13세기 향신료 물동량을 적은 기록을 보면, 동로마 전역에서 베네치아, 제노바로 가는 후추와 생강의 총량이 4백여 파운드에 불과한데 비해 [*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노바로 향하는 후추의 양은 연간 0파운드에 가까울 정도.] 십자군의 영역이었던 베이루트에서 베네치아, 제노바로 향한 향신료의 양은 연간 2천 파운드가 넘는 해도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트리폴리 백국]]의 시장이 콘스탄티노플의 귀족들에게 향신료를 제공하고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제국이 향신료 무역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 공국들이 붕괴된 13세기 말엽부터였다. 이때 당시, 내림세였던 제국의 경제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상업 공화정에게 유린당하면서도 콘스탄티노플, 테살로니키 등이 국제 무역항으로 떠올랐던 이유는 바로 서방 세력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대항구 역할을 베이루트, 시돈, 트리폴리 등에게서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3세기까지 지지부진했던 로마인들의 향료 무역은 14세기가 되면서, 그리스인들의 국외 진출에 따라 수배 증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